최근 국가보훈처가 실시한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2002년에 이어 두 번째로 탈락되었다.
탈락 이유는 사회주의 운동 전력이 있다는 것. 일제밀정 출신도 버젓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 마당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섰던 이가 사상의 차이로 탈락된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독립운동에 좌익과 우익의 구분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몽양 여운형선생을 단순히 좌익 사회주의사상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선생은 해방 후 극단적인 사상의 대치와 그로 비롯된 혼란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로인해 좌익과 우익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했던 선각자이다. 이런 선생이 두 번이나 연속 서훈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그리고 1938년 일제가 만든 전시통제기구 국민총력조선동맹 이사로 참여하고, 신문에 징병격려문을 기고한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를 비롯해 송진우 윤치영 등 11명은 친일행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광복절 하루 지나 실린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의 만평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친일도 독립운동도 덮어두고 살자~ 편안해질지어다~')
이래저래 안타깝고 답답한 차에 2년 전 곰탱이가 쓴 글이나 첨부해본다. 재미없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이해하시라. 쿨럭..
p.s. 열은 열대로 받고 새벽에는 축구 봐야하고 아침에는 강의실 자리 맡아야하고 곰탱이 오늘 잠은 다 잤다. 쩝..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배후와 그 의미
찬탁 반탁의 회오리 대 혼란 속에서 십여 차례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몽양은 오직 건국일념에 불타 조선인민당, 민족통일전선, 근로인민당 등을 창설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에 헌신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타리에서 嗚乎라!
조선민족의 대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은 반역의 백색테러의 흉탄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큰 별은 떨어졌다.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조선' '조선'이었다. *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그 기쁨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한반도는 연합국에 의한 남북분할 후 신탁통치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를 전후로 한반도는 신탁과 반탁, 좌익과 우익세력간의 대치와 혼란의 정국을 맞이했다. 이같은 좌우대립의 혼란을 그만두고 민족 모두가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기득권이자 주도권을 잃어 버릴까 봐 염려하던 여러 정치세력들과 기존의 친일파, 미군정의 방해 등의 이유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이후 선생은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결국에는 반대세력에 의해 암살 당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왜 암살 당해야 했으며, 또 선생의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가, 언론인이자 체육인이었던 선생은 일제시대 때의 활동으로 인해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선생을 따르는 이도 많았다.
** 하지만 그로인해 일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았다.
선생은 1945년 해방 후 우익과 좌익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정치조직을 결성하는 작업에 나섰는데 이는 민족 전체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구인 가칭 국민대헌장회의를 소집하려 한 것이다. 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공과 임정을 떠나고 정당을 초월한 방법으로 소집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소집위원회 내에 잠정적인 부서를 정해 당면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구상들로 인해 선생은 극단적 좌파였던 조선공산당에서부터 반공 극우파였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세력에게 견제를 받았고 그러한 견제는 곧 정치테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자들조차 감옥에 가둘 뿐 선생의 몸에 털끝 하나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을 해방 후 만 2년도 안되는 사이 안타깝게도 같은 핏줄을 타고 태어난 동족으로부터 선생은 12번의 테러를 당한 것이다.
*** 단순위협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의 테러와는 달리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선생에 대한 테러는 정치적 위협이 아니라 암살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대부분의 테러가 그렇듯이 선생에 대한 테러 또한 그 진범과 배후의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선생의 죽음으로 인해 어떤 정치세력이 가장 큰 이득을 얻었는지 따져본다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선생에 대한 테러와 암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지도자의 암살이란 그가 관철하려 했던 정치노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선생의 죽음은 곧 좌우합작의 실패이자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남북의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정치가로서 선생의 위치가 너무도 컸기에 선생을 암살한 배후세력이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거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원하는 세력이었을 것이고 좀더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본다면 미국과 이승만, 한국민주당으로 축약할 수 있다.
선생의 죽음으로 인해 미국과 이승만 그리고 한국민주당의 연합 하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실현되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대중적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기에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잃어버릴 지도 모를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했으며 단독정부 수립을 확정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미국 또한 선생의 암살에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선생의 암살을 방조했을 것이라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1947년 6월 28일, 선생의 암살이 있기 20일 전, 미군정의 하지는 서한을 통해 이승만 진영이 여러 건의 정치 암살을 계획하고 있으며 테러행위와 경제교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이러한 공개서한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을 우려하는 듯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이미 당시 미군정의 행동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정 측이 생각하는 선생의 존재란 껄끄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고
** 그러한 연유로 선생에 대한 암살계획을 알아차린 후에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저지는 물론이려니와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차 하지 않아 암살을 묵인․방조했을 것이다.
*** 하지의 서한이 가지는 의미는 미군정이 공식적으론 선생의 암살과 무관함을 선언하는 대외적 행사였을 뿐이었던 것이고 또한 이런 미군정의 속셈을 알고 있던 친일파로 가득 찬 경찰들은 오히려 암살에 적극 협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암살 당시 정황을 살펴보자면 우연치고는 너무 많은 경찰이 등장하는데
***** 단순히 우연의 일치만을 가지고 암살범과 경찰의 연관관계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선생의 암살이 있던 몇 달 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의 테러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범인들과 경찰과의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런 가능성은 당시 미군정조차도 수긍을 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암살의 배후에는 자신들의 이익에 급급했던 당시 친일부역세력, 이승만세력 등등으로 대표되는 반통일, 반민족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생에 관련된 사실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해방 후로부터 독립정부 수립까지의 3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격동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으며 당시로선 조선의 앞날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였다.
**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선생은 통일조국과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염원하던 선생의 소망과는 달리 선생은 끝내 암살당하였고, 남북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분단의 세월은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게다가 선생이 서거한지 50여년이 흐른 지금, 선생의 암살을 직접 조정, 지원했다고 말한 정치깡패 김두한은 의인화되어 그의 일대기가 그려진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 반공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남한 땅에서 선생은 회색분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고 선생에 대한 논의조차 금지 당했다. 1980년대 이후 선생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이루어졌다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청원하는 서명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다는데 한반도에서의 역사의 물결은 우리의 무관심덕에 거꾸로 거슬러 오르고만 있다. 그나마 남북한의 정치지도자가 서로 만나 회담을 하고, 각종 현실적인 교류가 추진되는 등의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지만 여전히 남과 북의 정치인들은 통일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아전인수 격으로 이용하려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50여년이 넘도록 분단 생활을 보내고 있던 남북의 통일을 준비하기위해 이런저런 문제들로 난항을 겪고 있는 현 상황을 살펴볼 때 오직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 사상을 초월했던 선생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 몽양 여운형 선생 순국 50주년을 맞아 「巨星의 光輝」라는 제목으로 시인이자 『몽양 여운형전기』를 쓴 이기형 선생의 글에서 발췌
** 1919년 일본에 건너가 일제 군계, 정계의 거물들을 만나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며 1932년부터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체육회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는 선생이 당한 테러 중 알려진 것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 1945년 8월 18일 오전 1시경 : 계동 자택 앞에서 곤봉 피습
2. 1945년 9월 7일 저녁 :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임, 행인이 구제
3. 1945년 12월 상순 : 배천온천 여관에서 피습
4, 1946년 1월 : 창신동 친구집을 괴한 5명이 습격
5. 1946년 4월 18일 오전 9시 : 관수교에서 괴한들이 포위, 행인이 구출
6. 1946년 5월 8일 : 서울운동장에서 수류탄 테러 사전 발각
7. 1946년 5월 하순 10시경 : 종로에서 괴한들에 포위 격투 끝에서 행인이 구출
8. 1946년 7월 17일 : 신당동 산에서 교살 직적 벼랑에서 낙하 도피
9. 1946년 10월 7일 저녁 : 자택 문전에서 납치
10. 1947년 3월 17일 밤 : 계동침실 폭파
11. 1947년 5월 12일 하오 7시 30분 : 혜화동 로타리에서 권총으로 승용차 피습
12.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 서거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는 정치지도자의 암살에 대해 “운동노선은 인간관계의 유대와 연대의 그물 망 끝에 위치하기 마련이고 정치지도자들은 그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가 된다. 정치지도자 한 사람의 살해는 그물 한 코 한 코만의 손실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그물을 손상하기 마련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에 의하면 이승만과 한민당의 경우 1947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승만은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 21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는 단독정부의 수립과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정권을 담당하기 위한 미국 내의 지지를 구했다고 한다.
*「서울신문」1947. 7. 3, 「조선일보」 1947. 7. 2.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는 1947년 8월 26~27일, 선생 암살 후 웨드마이어장군과 회담을 가졌던 하지가 “여운형은 암살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으며 매우 음흉한 인물이었다. 우리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감쪽같이 배반 하였다” 라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선생이 조선사정소개회 회장 김용준 씨에게 보낸 생애 마지막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정황을 말하고 있다. “상략 - 친애하는 김선생, 선생에게 하는 말이오만은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에서는 선생을 암살한 암살범들의 증언과 그들과 관련된 회고록 등을 통해 선생의 암살사건에 경찰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들 회고록 대부분에서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선생이 살해된 곳은 파출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고 암살범이 저격할 수 있을 만큼 선생이 탄 차의 속력을 줄이게 한 것도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가 우연히 가로막은 것 때문이다. 또한 현장근처에서 우연히 고장난 경찰차를 수리하던 경관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범행현장을 목격한 후 범인 대신 범인을 추격하던 선생의 경호원을 체포했다. 더구나 범행현장 일대의 모든 전화가 불통되었지만, 선생의 측근과 추종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에서는 미군정의 G-2가 선생의 암살범을 잡기 위해 경찰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과 장택상 밑의 경찰에 ‘블랙 타이거 갱’이라는 테러조직이 있음을 적발한 것을 밝히며 이러한 정황들을 바탕으로 선생의 암살에 이승만에서 장택상으로 이어지는 끈, 그리고 경찰과 극우 테러 청년단체로 이어지는 끈들의 결합을 추측하고 있다.
**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침지연교수는 『韓國史論 27』에 게제한 「1945~1948년 남한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연구」에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해방정국이라고 불리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3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해방정국은 시작되었지만, 통일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데서, 해방정국은 어느 의미에서는 아직도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 현대정치의 모태가 형성되었고 제반 정치과정의 틀이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김두한은 1963년 발간된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을 통해 자신이 여운형 선생의 암살을 직접 조종, 지원했고 그 배후에는 장택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에서는 “몽양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박태균, 지성사
『몽양여운형평전』정병준, 한울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Ⅴ / 韓國史論 27, 1997』
몽양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 http://mongyang.org